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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르네상스 시대부터 초현실주의까지 시대별로 나누어
시대를 대표한 유명한 화가들의 일생과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티
렘브란트 반 레인 - 요하네스 베르메르
디에고 벨라스케스 - 프란시스코 고야
에두아르 마네 - 클로드 모네
폴 고갱 - 빈센트 반 고흐
오귀스트 로댕 - 카미유 클로델
앙리 마티스 -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 르네 마그리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근대 조각사,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언제나 알고 싶었지만 막상 공부하기에는 막연하고.
관련된 내용만 나오면 정리가 전혀 안되어서 흩어져 있기만 해서.
음악사, 역사, 미술사 이런 교양 관련한 지식에는 약간의 컴플렉스 마저 있었다.
물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지만,
딱 두 명씩만, 그것도 대부분 서로 관계있는, 뽑아서 설명을 하니
오히려 머릿속에 뼈대가 일단 잡히는 것 같다.
대부분이 익숙한 이름의 작가들이고,
그들의 작품도 낯설지가 않은 것이 많다.
가장 낯선게 디에고 벨라스케스.
화가의 이름은 커녕 작품 사진을 봐도 모두 낯설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작품 <옷 벗은 마하>는 예전에
[데굴데굴 세계여행]에서 봤던 기억이라도 있었지...
읽으면서 컴플렉스가 있던 지식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라 굉장히 뿌듯했다.
책을 읽고 나서도 그냥 텍스트를 한 번 읽었다는 것에 그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책은 그냥 읽어도 많이 남고, 또 확실히 내용을 흡수하고 싶다는 욕심도 많이나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린 편인데
(읽는 건 순식간, 정리가 오래걸림)
읽는 도중 언니가 학회 때문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갔었다.
나한테 선물로 퍼즐 사줄까? 하고 보내온 사진의 그림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우유 붓는 여인 이라고 굉장히, 굉장히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언니가 미술관 들렀다가 사온 그림책의 표지가
렘브란트의 <야간순찰> 이었는데, 이 그림을 한 번에 알아본것도 매우 뿌듯했다.
소설책은 물론 재미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가독성이 좋고 흡인력이 있어서 푹 빠져서 읽는 편이다.
마지막에 먹먹함이나 안타까움 등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정이 남아있는 경우도 많고.
그러나 이렇게 지식이 쌓이는 즐거움은 또 다른 것 같다.
미술사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깨우친 것 같다.
아예 스탯이 존재조차 하지 않다가 이제 경험치 10 정도 쌓은 느낌 ㅋㅋ
이 기세를 몰아서 또 다른 간단히 정리된 미술사책이나,
아니명 아예 한 시대 (르네상스, 인상파, 아수주의 등)의 다양한 모습을
서술해 놓은 책들을 골라서 읽어봐야겠다.
만족만족 대만족!
내가 펀듀에 물린 것만 아니었어도..
돈때문에 울고 있는 처지만 아니었어도,
꼭 사다가 내 방 책장에 꽂아뒀을 정도로 넘넘 좋은 책이었다.
이 작가님이 혹시 신간 내시면 그것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1. 르네상스 Renaissance
르네상스는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을 말한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다잇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던 시기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중요시하고 인간 중심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신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했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 유럽의 문화예술계에 나타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이 바로 르네상스다.
14~16세기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운 시기로, 특히 피렌체,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등의 도시가 경제력으로 자치권을 사들여 영주나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신(또는 교회, 신앙)보다는 인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과학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지면서 중세는 몰락하고 근세의 도래가 촉진되었다.
고전주의의 부활, 인본주의, 개인의 창조성 등의 특징을 가진 르네상스 정신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분야가 바로 미술이다. 르네상스 미술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후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당시 미술은 원근법의 발견에 따라 객관적 사실주의를 추구했으며, 안정적인 피라미드 구도 등의 수학적 원칙을 그림에 적용했다. 다시 말해 서구 미술의 지향점, 즉 삼차원의 입체를 이차원의 평면에 생생하게 담아내는 '재현'의 목표와 방법론이 시작된 시기인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여전히 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다루었지만 중세의 작품들과 달리 대상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즉, 당시의 미술 작품 속에서 예수와 마리아는 자애로운 감정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건축에서는 고딕식 첨탑이 사라지고 균제미를 강조한 그리스와 로마식의 안정감 있는 건축 양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인 마사초를 비롯해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베첼리오 티치아노와 북유럽의 얀 반 에이크, 피테르 브뢰헬, 알브레히트 뒤러 등이 있다.
2. 바로크 Baroque
바로크는 르네상스에 뒤이어 유행한 예술 양식으로, '기묘한 모양의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가진 포르투갈어 바로코에서 유래했다. 애초에 바로크라는 용어는 균형미와 비례를 중시하는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 양식과 비교했을 때 불규칙적이고 과시적인 건축과 조각을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스위스의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이 바로크를 비평 용어로 사용하면서 원래 지닌 뜻보다 격이 높아졌고, 현재는 한 시대의 예술 사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유럽 문명사는 대략 1600년대부터 1750년까지를 바로크 시대로 규정한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에 맞서는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는 절대 왕정 체제가 부상했다. 가톨릭은 16세기 격동의 종교 개혁에서 살아남았고, 우세를 확실히 하기 위해 신도에게 종교적 경회심과 감동을 불러일으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가톨릭은 화려한 예술 작품을 활용했다. 절대 군주들 또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가에게 웅장하고 화려한 양식의 건축물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르네상스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모멸을 받은 바로크 예술이 크게 유행한 것이다.
바로크 미술은 로마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인물의 역동적인 형태를 강조하고 빛과 어둠을 대비해 연극적 화면을 창조한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지오가 전기 바로크 미술의 시작을 알렸고, 그를 기점으로 플랑드르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스페인의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랑스의 니콜라 푸생과 샤를 르 브룅 등이 바로크 미술의 계보를 이어갔다. 이들은 바로크 양식으로 종교화를 제작해 종교 권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바로크 미술은 사물의 형태보다는 움직임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강한 명암 대비로 작품속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하고 역동성을 더해 입체감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과 루벤스의 <십자가를 세움> 등이 있다.
바로크는 미술을 시작으로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를 화려하게 물들였다. 바로크 음악은 단순한 박자에 장식음과 반복이 많아 경쾌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바흐(1685-1750)와 헨델(1685-1759), 비발디(1678-1741)로 대표되는 바로크 음악은 궁정에서 주로 연주되다가 바흐의 죽음과 함께 쇠락했다. 한편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이탈리아의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과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꼽을 수 있다.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은 프란체스코 보로미나(1599-1667)가 건축한 것으로, 역동적으로 물결치는 곡선의 벽면이 바로크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의 명령으로 증축된 베르사유 궁전은 거대한 정원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실내 장시긍로 절대왕정 당시 강력했던 왕권을 상징한다.
바로크는 종교적 갈등이 표면적으로 해결되고 왕정의 권력 구도가 바뀌면서 막을 내리는 듯 했으나 이후 로코코 양식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잠시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종교의 선전도구로, 절대왕정의 과시 욕구로 발전한 바로크 양식은 당시 거의 모든 예술 분야를 복잡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바로크가 없었다면 우리는 르네상스 예술의 균형미도, 로코코 예술의 아담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3. 로코코 Rococo
로코코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예술 사조로,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 전역에 확상되어 유행했다. 로코코 양식을 시작으로 프랑스는 예술 사조의 발원지로서 자리잡게 된다.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한 17세기 프랑스에서는 바로크 양식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등극하면서 엄격한 고전주의적 바로크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좀 더 장식적이고 경쾌한 분위기의 예술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귀족 중심의 장식적 예술이었다. 바로 이 흐름이 로코코다.
로코코(Rococo)라는 명칭은 '조개 껍데기 모양의 장식'을 뜻하는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카이유는 유럽에서 정원의 분수대나 가구 등에 붙이는 장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명칭의 기원에서 드러나듯 로코코 양식은 대체로 화려하고 장식을 강조했으며, 여성적이고 감각적인 특징을 보인다. 특히 건축에서 화려하고 밝은 색채의 실내 장식이 유행했고, 궁정부인들의 사교장인 살롱 문화가 생겨나며 더욱 발전했다.
미술에서는 프랑스의 화가 장 앙투안 와토(1684-1721)가 로코코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 프랑수아 부셰(1703-1770)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 등이 그 흐름을 이어 갔다. 로코코 화풍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와토의 <시테라 섬으로의 출항>을 꼽을 수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견문을 넓히고 교양을 쌓기 위해 '그랑 투어'를 떠난 모습이다. 그랑투어는 18세기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한 풍속으로, 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적지와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탈리아 등을 다니며 여행했다. 하지만 그림을 살펴보면 여행의 목적인 견문 확장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대신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 시테라 섬에서 남녀가 짝을 이루어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와토는 이들을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그림 왼편에 큐피드를 그려 넣어 사랑스럽게 표현했다. 이 작품은 밝은 색채로 감미로운 느낌을 주며, 우아하면서 향락적인 로코코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로코코 미술의 탐미적인 특성은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비난받기 시작한다. 특히 그림은 도덕적이고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신고전주의 예술가들의 맹렬한 비판 속에서 서서히 쇠퇴해갔다. 하지만 로코코 미술의 심미적 측면은 이후 장식미술의 기초가 되었다.
4. 인상주의 Impressionism
순간순간의 장면을 빠르게 포착해내는 스냅사진은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스냅사진의 '우연성'을 그림에 그대로 대입했다. 1839년, 사진술이 발명되자 당시의 화가들은 대부분 회화가 쇠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오히려 사진의 특수성을 그림으로 가져와 새로운 예술 양식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인상주의 화가였던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보면 그림의 중심이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 있고, 마치 즉흥적으로 촬영한 스냅사진처럼 가장자리의 인물들이 화폭 바깥으로 잘려 나간 모습이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회화 양식의 흐름으로, 빛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색채를 해석해 순간의 인상을 화폭에 담아냈던 경향을 가리킨다. 인상주의는 기존 회화에서는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방식의 '보는 법'과 '그리는 법'을 탄생시켰다. 또한 전통적 회화의 기초적 방법론, 즉 원근법과 명암법, 안정적 구도 등을 모두 해체하여 근대 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앞서 살펴본 에두아르 마네와 클로드 모네가 있으며, 이들 외에도 에드가 드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기존의 아카데믹한 화풍을 거부했다. 전통을 따르는 화가들이 사실적 묘사와 재현적 색채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인상주의 화가들은 각자의 눈에 담긴 색채와 대상에 대한 즉각적 '인상'을 강조하며 재현적 색채 대신 빛에 따라 변화하는 순간의 색채를 화폭에 담아냈다. 또한 1850년대에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한 일본의 목판화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아 평면적인 화면과 밝은 색조 등의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작업한 그들의 작품은 보수적이었던 당시 미술계의 기준에서는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모네를 중심으로 개최한 인상주의 그룹전 역시 관람객과 비평가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고 이후 마침내 화단의 인정을 받게 된다.
사실 인상주의 작가들은 각자 개별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서로 아주 다른 양식으로 작업했다. 모네는 '구성원 대부분이 인상주의자가 아닌 어떤 한 그룹에 붙은 이름이 내게서 기인했다는 사실에 낙담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인상주의 작가들 사이에 합의된 이론이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대상의 인상을 포착해 순간의 본질을 파악하려 한 점에서 그들은 공통적이다. 또한 작업실에서 벗어나 자연의 빛이 있는 야외에서 작업하며 -드가는 예외적으로 실내 작업을 선호했지만- 19세기 프랑스의 풍경과 도시인의 삶을 주로 화폭에 담아냈다. 주변의 비판과 조롱에도 그들만의 관점을 지키며 작품에 몰두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렇게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
5. 후기 인상주의 Post Impressionism
후기 인상주의는 1890년대에서 1905년 사이 프랑스에서 나타난 예술 사조를 가리킨다. 1910년, 영국의 비평가 로저 프라이가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개최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자들'이라는 전시회에서 처음 사용한 명칭으로 당시에는 그저 인상주의 이후의 흐름을 뜻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집단적 형태를 이룬 인상주의 그룹이 화단에 두각을 나타낸 이후, 고갱처럼 인상주의 그룹에 속했었거나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차츰 그 영향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방향을 모색하여 인상주의에 반발을 꾀한 작가들, 대표적으로 고갱과 고흐, 그리고 폴 세잔을 후기 인상주의 작가로 꼽는다. 이들은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색채와 시각적 즉흥성을 추구하는 인상주의 화풍에 대해 무계획적이라며 비판했다. 인상주의가 다소 소홀하게 여겼던 형태에 다시 주목했고, 형태와 색채를 더욱 견고하게 결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더 이상 한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데 매달리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집중하여 개별적으로 작가 개인의 특징을 찾아나섰다.
고갱은 자의적으로 해석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그만의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어냈고, 인상주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주관적 감정이 표출되는 그림을 그렸다. 또한 그는 작품 속 개별적인 대상에 뚜렷한 윤곽선을 넣어 평면의 느낌을 부각했다. 고흐역시 사실적인 묘사 방식을 거부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사실적이지 않은 그림이 사실 그대로 묘사한 그림보다 더욱 진실하게 보이기를 원했다. 특유의 짧게 끊기는 붓터치와 밝게 빛나는 보색대비는 고흐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며 이는 이후 표현주의 기법의 바타잉 되었다. 한편 세잔은 사물의 겉모양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거부하며 자연의 본질적 형태, 즉 기하학적 구조에 주목했다.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의 형상으로 해석해 사물의 외형을 단순화했으며, 본질에 가까운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했다. 그가 추구한 기하학적 표현과 시점의 다양화는 이후 입체주의가 탄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고갱과 고흐, 세잔은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이지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해 그룹으로서의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다. 후기 인상주의는 그룹전을 통해 하나의 집단으로 활동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다르게 개별 작가의 개인적 활동을 한데 묶어서 일컫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후기 인상주의의 공통된 화풍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후대의 예술 양식, 즉 20세기 이후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6. 근대 조각사
18세기 이후 서구의 조각은 주로 역사적 인물의 기념 동상이나 초상 조각 등을 만들어 내는 천편일률적 공공미술의 형태로 전략했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가 우위를 쌓아 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각은 점차 장식적 요소로 치부되었다. 그렇게 19세기 중반까지 지나치게 이상적인 형태이거나 기념비적 성격이 명백한 대형 작품들, 그리고 지극히 장식적인 용도의 조각이 난립했다. 조각의 영역에서는 아직 19세기 이후 '근대'라 부르는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 조각의 위상을 다시금 독립된 장르로 일으켜 세우고 근대 조각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한 예술가가 바로 로댕이다. 로댕이 보여 주었던 근대적인 요소들 때문에 그의 조각 작품을 '인상주의적 조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비록 인상주의는 회화에 국한되어 발전했으나 기존의 전통적 관습을 거부하고 혁신을 이루어 낸 인상주의 작가들의 행보를 로댕에게서 그대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로댕을 인상주의 미술의 흐름안에서 함께 살펴보기도 한다.
로댕의 뒤를 이어 현대 조각을 이끌어 간 작가는 앙투안 부르델(Antoine Broudelle 1861-1929), 아리스티드 마용(Aristide Maillol, 1861-1944) 등이다. 부르델은 에콜 데 보자르의 고전적인 조각 교육 시스템을 거부하고 로댕의 작업실에서 제자로 지내며 그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오랜 기간 로댕의 조수로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고전의 재생을 추구했다. 부르델은 고대 그리스와 가장 프랑스답다고 일컫는 중세 조각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건축의 아래에 있던 조각을 독립적 예술 분야로 키워 나간 로댕과 달리 그는 조각의 건축적 구성과 양식에 주목했다. 그리고 로댕이 보여 주었던 인간의 감정이 담긴 조각에 건축의 요소를 넣어 자신의 작품을 구축했다. 로댕이 '미래의 등불'이라 칭찬한 부르델의 대표작으로는 <활 쏘는 헤라클라스>, <베토벤>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이후 알베르토 자코메티,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같은 현대 조각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본질을 찾기 위해 형상을 제거해 나가는 단순화 작업의 흐림이 이어졌다.
한편 로댕이 '그의 작품은 호기심을 일으킬 요소가 없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답다. 내가 죽으면 그가 나를 대신할 것이다.'라며 극찬한 마욜은 사실 고갱의 영향을 받은 반인상주의 그룹 나비파(Nabis)의 화가로 예술계에 등장했다. 하지만 시력이 악화되는 탓에 40살에 조각가로 전향했다. 주로 여성의 누드 조각을 시리즈로 제작했으며, 다양한 소재로 단순한 구조를 추구해 나갔다. 그의 작품은 헨리 무어(1898-1986)의 인체 조각에 영향을 끼치며 20세기 추상 조각이 등장하는 데 발판이 되었다.
7. 야수주의 Fauvism 와 입체주의 Cubism
20세기 초에 등장한 예술 사조의 두 축,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는 후기 인상주의에서 파생되었다 고갱과 고흐, 세잔이 서로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새로운 흐름이 탄생한 것이다. 고갱과 고흐의 작품은 새로운 색채를 향한 열정을 품은 마티스에게, 기하학적 형태와 다수 시점을 담은 세잔의 작품은 피카소와 브라크에게 각각 영향을 주었다.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는 전통적 회화의 기법을 완전히 파괴한 혁신적인 흐름이었다. 회화의 기본 요소이자 그 자체로 오랜 시간 경쟁 구도를 만들어 왔던 '색채'와 '형태'는 마침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화면에 등장했다.
색채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는 마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의 객관적 색채, 즉 고유색에서 벗어나 작가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서 비롯된 주관적 색채를 사용한 그의 그림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등이 출품한 1905년 가을의 살롱 도톤에는 이렇듯 강렬한 색채로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들이 걸렸고, 앞서 살펴보았듯 이 전시회에서 '야수주의'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색채의 가능성에 주목한 야수주의 화가들은 원색으로 대담한 표현을 즐겼으며, 이는 주관적 표현과 형식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비록 야수주의 그룹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지만 그 영향력은 컸기에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다다이즘과 이에 영향을 받은 초현실주의 역시 야수주의에 바탕을 두고 탄생했다. 후대의 이 예술 사조들 역시 전통적 미술의 거부라는 동일한 지향점을 가지고 발전해 갔다.
한편 피카소는 형태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서양 회화를 지배해온 원근법과 고전적인 인물 표현법 등을 철저히 무시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대상의 형태를 바라보았다. 그의 화면에서 형태는 잘게 분할되어 파편으로 등장했고, 다수 시점의 형태가 평면에 중첩되어 나타났다. 그렇게 시작된 입체주의는 1907년부터 1914년 사이에 파리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초기의 기하학적 입체주의에서 분석적 입체주의, 후기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변화하며 발전하는 양상도 매우 빨랐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피카소 뿐만 아니라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눈 브라크가 있었다. 한때 야수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피카소의 그림에 매료된 후 입체주의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들은 거의 매일 만나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들의 우정과 함께 입체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대중은 입체주의 작품을 단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전시의 무질서 속에서 예술 사조로서 입체주의의 명맥은 끊어진다.
야수주의는 '색채'에서, 입체주의는 '형태'에서 출발했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출발했으나 두 사조는 르네상스 이후로 이어진 서구 미술의 전통과 관습에 철저히 도전해 이를 전복한 최초의 현대적 예술 사조라는 점에서 공통된 가치를 지닌다.
8. 초현실주의 Surrealism
현실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보고 찾고 표현하려고 한 흐름. 바로 초현실주의다. 이 문예사조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틈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1924년.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초현신ㄹ주의는 공식적으로 출범되었다. 그러나 현실 너머에 대한 관심, 즉 이성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관심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1900)을 발간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된 셈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의미 없는 무의식의 파편들이 아니라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의 발현으로 보았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의 저서에 열광한 이들 중 한 무리였다. 이들은 비이성적인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 주목했으며, 환상적 표현과 상상력으로 시각예술의 새로운 시도에 앞장섰다.
사실 초현실주의는 문학운동으로 출발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의 수장이었던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해 주요 멤버들 역시 대부분 문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주로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에 따라 말을 내뱉거나 빠르게 적는 방식의 '자동기술법'으로 작품을 만들어 냈는데, 화가들이 이러한 기법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면서 초현실주의는 회화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안해 낸 기법에는 현재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데칼코마니나 콜라주, 사물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 등의 도구로 문질러 무늬를 얻는 프로타주 등이 있다. 이러한 기법은 의식의 검열 없이 우연한 효과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 예술가에게 사랑받았다. 이들은 이성의 지배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기이하고 모순적인 이미지를 화면에 담아냈다. 한편 일상의 친숙한 이미지를 엉뚱한 공간에 배치해 낯선 화면을 만들어 내는 초현실주의 기법 '데페이즈망'은 대표적으로 르네 마그리트가 즐겨 사용했다. 회화에서 초현실주의는 이후 막스 에른스트와 호안 미로가 보여 준,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같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흐름과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처럼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 낯설과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흐름 두 갈래로 나뉘어 발전한다. 1930년에 들어서면서 초현실주의는 절정을 맞이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르통을 비롯한 작가 대부분이 흩어지면서 막을 내린다. 그 후 초현실주의는 194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에서 다시 유행했고, 특히 자동기술법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을 비롯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살바도르 달리와 르네 마그리트의 사실적, 재현적 이미지의 초현실주의 회화는 이후 팝아트의 시각적 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프레스코 (Fresco) - 전통적인 벽화기법.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으로 축축한 상태의 덜마른 회반죽 벽면에 수분이 있는 동안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말한다. 물감이 배어든 회반죽이 마르면서 그림과 벽이 일체가 되어 벽의 수명만큼 벽화도 유지된다. 습기에 강하므로 쉽게 부식되거나 그림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회반죽의 수분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림을 그려야 하며, 한 번 그린 글미은 수정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 테네브리즘 : '어두운 방식'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거장 카라바지오가 고안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마치 연극 무대 위의 인공 조명처럼 그림 속 주요 인물들만 빛을 받아 밝게 보이고 그 외의 배경은 어둡게 표현해 강한 명암의 대비를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이는 17세기에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카라바지오의 스타일을 추종하는 화가들이 생겨나면서 이들을 카라바지스타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 반달리즘 : 반달리즘이란 의도적으로 예술품이나 문화재를 훼손하는 행위를 말한다.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은 1911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난도질을 당했고 1990년에는 정신이상자가 작품에 황산을 뿌리기도 했다.
* 임파스토 : 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림의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볼록한 부분과 덜 발려 오목한 부분의 질감차이를 만들어 내 화면 자체에서 깊이감을 추구하는 기법
* 우키요에 는 19세기 말 일본이 해외로 수출하는 차나 도자기 등의 포장지에 인쇄하면서 유럽에 알려졌다. 이 판화는 당시 서구에서 볼 수 없었던 밝은 색채와 대담한 구성으로 유럽의 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유럽 미술에 미친 일본 미술의 영향을 자포니즘 혹은 일본풍이라 불렀다.
1. 르네상스
최초의 르네상스맨,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수태고지>
그 전까지 수태고지를 주제로한 작품은 마리아가 있는 실내 풍경을 배경으로 그렸으나 레오나르도는 원근법의 효과를 극적으로 배가하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를 정원과 연결된 테라스로 데려왔다. 정원에 핀 꽃은 식물도감을 보듯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고, 천사 가브리엘의 날개는 새의 날개를 관ㄴ찰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자궁 속의 태아>
현재의 해부학 사진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정확도에서 뒤지지 않는다. 특히 임신한 여성의 자궁을 그린 드로잉은 현대 해부학 교재의 고전으로 꼽히는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에 실려 있을 정도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이전의 화가들은 유다를 제자들의 무리에 두지 않고 혼자 따로 그리거나 유다에게만 후광을 넣지 않아 누가 보더라도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일차원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다른 제자들 사이에 유다를 그려 화면의 긴장감을 높였다. 또한 배신자의 존재가 알려지는 순간 각기 다른 제자들의 감정적 반응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두려움과 놀람, 배신자에 대한 분노 등이 각 인물의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나는데, 이러한 성격적 특징을 통해 그들이 각자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다. 다혈질의 성격을 가진 베드로는 예수의 바로 오른편에 앉은 요한의 어깨를 잡고 마치 누가 배신자인지 알아내려는 듯한 모습으로 격력하게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이로 인해 베드로와 요한의 사이에 앉은 유다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밀쳐진 모습이다. 예수의 왼편을 보면 의심 많은 도마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배신자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오랜시간 이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하면서 그림 속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위치와 동작을 거듭 고민하고 연구했다. 당시에 이미 그는 인물의 심리 묘사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최후의 만찬> 속 그날의 생생한 긴장감이 역사적 걸작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긴 시간 공들인 작업 과정이 결국 <최후의 만찬>을 실패한 걸작으로 만들어 버렸다. 수정이 불가능하고 짧은 시간에 정해진 만큼의 분량을 빨리빨리 그려내야만 하는 프레스코(Fresco)로는 인물들의 심리를 세심하고 극적으로 묘사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레오나르도는 템페라로 벽화를 그린 것이다. 덕분에 수차례에 걸친 수정과 덧칠로 각 인물의 섬세한 표정과 몸짓을 표현해 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를 위해 벽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영속성을 잃었다. 프레스코와 달리 템페라는 느린 속도로 작업하며 여러 번 수정할 수 있으며, 달걀 노른자에 안료를 개어 사용하므로 그림에 투명하고 부드러운 광택이 더해져 프레스코보다 시각적인 효과가 월등하다. 또한 프레스코는 안료의 색이 제한적이었으나 유화 방식의 템페라는 다양한 색채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달걀을 사용하기에 습기와 열기에 취약했다. 이는 밀라노의 습한 기후를 고려하지 못한 레오나르도의 치명적 실수였다. 게다가 벽화를 그린 곳은 수도원의 식당으로, 습기와 열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곳이었다. <최후의 만찬>은 그림이 완성된 지 3년이 채 되기도 전에 균열이 생기고 색감이 변하기 시작하여 그 형태와 색채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로도 홍수와 침수, 전장, 그리고 몇 번의 잘못된 복원 작업으로 원래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최후의 만찬>은 1978년부터 약 21년간 지속된 마지막 복원 작업으로 일부 원래의 색을 찾고 창문이 환하게 복구된 모습이다.
<모나리자 - 리사 델 조콘도의 초상>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에 의하면 모나리자의 모델은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부인 엘리사베타(리자), 즉 조콘도 부인을 그린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프란체스코가 16살의 어린 아내를 새로 맞이하며 그녀에게 초상화를 선물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모나리자>가 신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림 속 여인의 알 듯 말 듯한 미소 때문인데, 이는 스푸마토(sfumato)기법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처음 시도한 스푸마토라는 명암 채색법은 물체의 윤곽선을 또렷하게 그리지 않고 은은하게 번지듯 표현해서 그림에 깊이감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흐릿하게 표현된 모나리자의 눈꼬리, 입꼬리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조각가로 불리고 싶었던 사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75-1564
<피에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피에타(pieta)는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빠져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조각상을 의마한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작품으로, 마리아의 어깨를 휘감은 띠에 '피렌체 사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이것을 만들다'라고 음각을 새겼을 정도이니 아마도 그가 무척 흡족하게 여긴 작품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예수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마리아의 얼굴이 매우 젊은 여성으로 표현된 것이다. 사실 앳된 마리아의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를 마리아의 순결함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내면에 품고 있었던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려 낸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7살에 어머니를 잃은 그가 평생동안 기억하는 어머니는 어린 아이를 가진 젊은 여성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켈란젤로 작품 속의 어머니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다.
<다윗>
스토리가 돋보이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인간 다윗의 내면에 관심을 두었다. 그가 표현한 다윗은 결의에 차 보이기도 하고 번민에 싸인 듯도 하다. 만약 다윗을 조각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우수에 찬 눈빛의 건강한 젊은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영웅 다윗이라기보다는 인간 다윗의 모습이다.
한편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정면에서 바라본다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비율에 맞지 않게 머리가 큰 데다가 거대한 오른손도 부자연스럽다.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에서 완벽히 해부학을 익혔던 미켈란젤로가 실수라도 한 걸까?
애초에 <다윗>은 사람들이 올려다보아야 하는 조각상이었다. 다시 말해 피렌체 시민에게 자유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높은 곳에 조각상을 설치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이 아래쪽에서 올려다볼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시선에서 완벽한 균형미를 이룰 수 있도록 조각했다. 즉 철저한 계산을 통해 부분을 확대하고 강조했던 것이다.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의 비어있는 벽에 그린 벽화 <최후의 심판>은 7년여의 시간이 걸려 완성되었다.
이 작품에는 무려 400여 명의 군상이 담겨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진노의 날(dies irae)'을 그린 것으로, 선택받은 자들과 선택받지 못해 지옥으로 내려가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뇌가 한데 어우러진 역작이다. 육체의 덩어리로 표현된 인물들, 인물의 역동적인 뒤틀림은 미켈란젤로의 회화에 나타나는 특징인데, 이는 바로 그가 추구한 '조각적 인물'의 표현이다. 여러번 수정하며 작업할 수 있는 회화와 달리 한 번에 정확하고 완벽하게 형태를 구현해야 하는 조각을 더 우월한 예술이라 생각한 미켈란젤로는 마치 조각상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처럼 회화 속 인물을 운동선수처럼 강건한 육체로 묘사했다. 조각가로 살고 싶었던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최후의 심판>에서는 예수조차 젊고 건강한 육체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옆에는 젊고 아름다운 모습의 성모 마리아가 있고, 그들의 주변을 구원받은 제자와 성인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체의 중요 부위를 천으로 가린 모습인데, 이 색색의 천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이 아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등장인물을 모두 누드로 그렸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을 처음 공개했을 때 사람들은 '마치 목욕탕 같다', '불경스럽다'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추기경단의 미사는 물론이고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시스티나 성당, 그 신성한 장소에서 미켈란젤로는 누드의 종교화를 그린 것이다. 이에 교황 바오로 4세가 미켈란젤로에게 그림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이후 미켈란젤로의 제자 볼테라가 스승의 그림을 손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천과 나뭇잎 등을 덧그렸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예수 발밑의 바르톨로메오가 들고있는 벗겨진 인피에 자신의 자화상도 슬쩍 그려넣었다. 조각을 더 사랑한 60대의 노쇠한 예술가가 감당해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매우 쇠약해졌고, 이후 단 한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고 조각ㄱ과 건축에만 매진했다.
바로크
빛과 어둠의 마법사, 렘브란트 반 레인 1606-1669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년 암스테르담의 외과의사 조합으로부터 의뢰받아 그린 그림.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특정 단체의 여러 인물이 비용을 각자 나누어 부담해 '그룹 초상화'를 의뢰하는 것이 상당한 인기였다. 그룹초상화는 기념촬영과 같은 목적이 컸으므로 경직된 모습의 인물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 방식으로 배치가 단조로웠고, 화면 속 인물이 모두 고른 비중으로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구도 역시 지루한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통해 인물의 기계적인 나열에서 벗어나 화면속에 극적인 요소를 담아내며 새로운 그룹 초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듯한 시신이다. 해부학 강의가 이루어지는 그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렘브란트는 해부대에 누워있는 시신에 주목한다. 시신을 비스듬하게 사선 방향으로 그려 넣어 비대칭적인 구도를 만들어 냈으며, 마시 반사판처럼 밝은 빛을 발산하는 시신이 화면의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해부학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의 이야기에 우리를 집중시킨다.
비대칭적인 구도와 인물들의 생동감 있는 표정, 사실적인 인체 해부의 묘사는 당대의 어떤 화가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기에 이 작품을 통해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의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명실상부 암스테르담 최고의 초상화가로 등극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연극적 빛이 주는 효과다. 렘브란트는 어둠과 빛의 대비를 강조해 화면 속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눈이 멀게 된 삼손>
렘브란트는 화면 속 인물의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는데, 특히 <눈이 멀게 된 삼손>은 등장인물의 격정적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다. 현실에 존재 하지 않는 신화 속 인물의 감정과 극적 순간을 테네브리즘 기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연출했다. 괴력의 원천인 머리카락이 잘려 버린 삼손은 무장한 블레셋 병사들에 의해 제압 당하고 두 눈마저 뽑히게 되는데, 삼손이 사랑하던 여인 델릴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자른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더욱 비극적이다. 렘브란트는 델릴라가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 도망가고 삼손이 블레셋 병사들에게 눈이 찔리는 순간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장면의 무대를 동굴로 설정한다. 어두운 동굴 안쪽과 빛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가 대조되면서 공간이 더욱 극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긴박한 분위기까지 조성되는 것이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간순찰)>
네덜란드 최고의 보물로 여겨지는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간순찰>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크다. 이 작품은 현재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그동안 단 한번도 국외로 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국가적으로 소중히 생각하는 네덜란드의 자랑거리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황금기를 맞이한 네덜란드를 화려하게 장식한 작품이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이 실제로는 행복의 절정에 머물러 있던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이 그림 역시 그룹 초상화인데, 이를 의뢰한 암스테르담 시민군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당시 조직되어 혁혁한 공로를 세운 민병대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매주 일요일 12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암스테르담 시가지를 행진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림의 모델은 시민군의 대장 바닝 코크와 부관, 그리고 부대원 16명이다. 즉 이 그림을 주문하고 비용을 지불한 사람은 뒷 배경의 방패에 이름이 써져있는 18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총 3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는 렘브란트가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연극적인 화면 연출로 인기를 얻었던 렘브란트는 화면 속에 역동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여러 명 넣어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특히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옷에 닭을 매단 소녀(요정)이다. 이 요정을 제외하고는 모든 등장인물이 남성이다. 시민군의 행진에 여성이 등장한 것 자체가 이상하고, 게다가 요정의 옷이 밝은 노란빛으로 채색되어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날개가 달린 그녀는 허리춤에 발톱이 날카로운 수탉을 거꾸로 매달고 있다. 수탉은 암스테르담 시민군의 상징물이었기에 그림 속 요정은 그 자체로 민병대의 마스코트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들의 그룹 초상화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이 요정 덕분에 전형적인 시민군의 그림으로 보이지 않게 되고, 또한 시민군을 지켜주는 수호 요정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이 요정의 얼굴은 렘브란트의 부인인 사스키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평범한 그룹 초상화가 아니라 역사화, 신화 속 상상력 넘치는 역동적 화면으로 표현해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주인공처럼 묘사된 바닝 코크는 이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으나, 다른 시민군들은 아니었다. 가상의 인물들 때문에 실제 작품을 의뢰한 주인공들의 얼굴이 배경으로 처리되거나 부분적으로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들에게는 역사화 같은 거창한 의미보다 그림 속에 각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작품을 시작으로 초상화가로서의 렘브란트의 인기는 급속도로 하락했다.
<자화상>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의 일기와 같아서, 자화상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그림의 변화에 따라 렘브란트 인생의 행로를 읽을 수 있다.
23살에 그린 <작업실의 화가>는 얼굴이 흐릿하고, 화면 중앙에는 거대한 캔버스가 있다. 작가로서 성공하기 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다.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크게 표현된 캔버스 앞에서 그는 작고 초라하다.
그러나 1640년의 <34살의 자화상> 속 렘브란트는 눈이 부실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지식인의 모습이다. 귀족적 풍모가 강조되었고,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1650년대 중반 이후 렘브란트는 다시 붓을 든 화가로 등장한다. 자신을 화가로 묘사한 최후의 작품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을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로 표현한다. 제욱시스는 못생긴 노파를 그리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었다는 인물이다.
수수께끼 같은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1632-1675
<우유 따르는 여인>
베르메스는 펴엄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에 관심을 두었다. 베르메르는 렘브란트와 달리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거나 결정적 순간을 그리는데 집중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도 보통 한두 명이기에 화면의 고요한 분위기가 더욱 강조된다.
베르메르의 작품 속 인물들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그들의 일을 하거나 생각에 잠겨있다. 다만 인물의 오른편에 있는 ㄴ창문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고 그 빛을 받은 인물과 실내의 여러 정물이 함께 반짝인다. 베르메르는 인물 그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빛과 그 빛을 받은 인물, 공간이 만들어 내는 색채의 풍요로움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인물이 있는 정물화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르메스는 소녀를 완벽한 어둠 속에 두고, 그녀의 존재 자체를 어둠에 저항하는 빛과 같이 표현했다. 빛의 사용에 능숙했던 그는 소녀를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배우처럼 강조함으로써 순수하면서도 왠지 모를 비밀을 가진 듯한 느낌으로 담아냈다. 관람객을 향한 시선과 살며시 벌어진 입술에서는 설렘의 감정이 드러나며,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 매료되는 우리는 그녀에게 더욱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한편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채색된 의상과 커다란 진주귀걸이, 소녀의 얼굴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만드는 검은 배경은 작품 속에서 강한 색채 대비를 이룬다. 그는 이렇듯 몇 개의 색채만을 가지고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화면을 완성해 냈다.
로코코
그림을 그리는 교양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1599-1660
<세비야의 물장수>
벨라스케스의 초기작품으로 그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테네브리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카누스의 대장간>
이탈리아 여행 이후 벨라스케스는 풍부한 색채표현과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주목하기 시작했다. 불카누스는 대장장이의 신이자 비너스의 남편이다. 그러나 절름발이에 못생긴 외모 때문에 비너스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비너스는 불카누스 몰래 전쟁의 신 마르스와 연인이 되어 밀회를 즐겼는데, 이들의 비밀을 알아차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태양의 신 아폴로였다. 벨라스케스는 아폴로가 불카누스에게 이 언짢은 소식을 전하는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이 찰나의 순간 불카누스가 느꼈을 수 많은 감정을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화면 속 인물들의 윤기가 흐르는 듯한 피부와 금속성 재질의 사실적인 묘사는 흠자을 데가 없을 정도다.
<브레다의 항복>
스페인은 30년 전쟁에서 전략적 요충지인 네덜란드 남부의 브레다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암브로조 스피놀라 지휘관의 통솔로 스페인은 브레다를 포위했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차단함으로써 네덜란드의 항복을 받아 냈다. 당시 스피놀라는 적이 명예롭게 철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벨라스케스는 살벌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이 인도주의적인 일화에 주목했고, 이를 화폭에 담아냈다. 전쟁을 다룬 여느 그림과는 달리 격렬한 전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쟁 그림이지만 관람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또한 패배한 네덜란드 군대는 이미 흐트러져 어수선한 반면 승리한 스페인 군대는 질서 정연하게 창을 들고 서 있다. 상대가 누구라도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다. 누가 보더라도 패배한 군대와 승리한 군대를 구분할 수 있다. 작가는 조국의 영광의 역사를 그리되 그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함께 담아내려 한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잔뜩 찌푸린 미간과 추켜세운 눈썹 때문에 꽤나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듯 까칠해 보이는 한 노인이 붉은 케이프를 두르고 붉은색 의자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팔걸이에 늘어뜨린 섬세하고 뾰족한 손가락에서 그의 신경질적 모습이 더욱 강조된다. 실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냉정하면서도 격정적 기질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초상화를 받아본 교황은 '너무 사실적'이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 작품의 진가를 인정해 주었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
누드화 제작이 금지된 사회적 배경 속에서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미술사상 최초의 누드화를 그렸다. 하지만 날개 달린 큐피드를 함께 그려 넣어 나체의 여성을 여신으로 표현했다. 또한 <옷벗은 마하>와 달리 누워 있는 뒷모습을 그렸기에 외설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지 않는다.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에는 비너스의 얼굴이 비치는데, 거울 속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조금 어색해 보인다. 그 이유는 거울 속 비너스의 얼굴이 흐릿하지만 우리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여성의 몸을 보여주고자 했던 다른 화가들과 달리 벨라스케스는 관객이 비너스의 표정과 그녀의 눈빛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지는 않지만 관객과 시선을 교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이전 작품들 속의 수동적 여인들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당시의 남성 중심적 예술계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 속 나체의 여인은 단순히 관찰과 관음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을 가지고 반응하는 존재로서 등장했다.
흥미롭게도 이 그림은 1914년 여성 참정권을 위해 활동했던 여권운동가 메리 리차드슨에게 난도질을 당하며 더욱 유명해졌다.
<시녀들, 또는 펠리페 4세의 가족>
나는 그리고 싶은대로 그린다,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
<옷 ㅇ벗은 마하>
18세기 스페인에서는 신분이 미천한 남녀가 화려한 옷을 입고 귀족 흉내 내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마호 또는 마하라고 불렀다. 따라서 작품 속 여성은 귀족 신분이 아닌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림 속 이름모를 마하는 벌거벗은 채 당당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시선 때문에 오히려 관객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한다. 자신의 몸을 더욱 과감하게 보여주겠다는 듯 두 팔을 올린 그녀의 표정에서 부끄러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 <옷 벗은 마하>를 문제적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전 시기의 여성 누드화에서는 작품의 모델이 설령 매춘부라 할지라도 신화 속 성스러운 여신의 모습으로 표현해 온 것이 일반적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나체의 비너스를 그린 그림들처럼 말이다. 이들 작품에서 비너스는 대개 부끄러운 듯 수줍은 표정이거나 눈을 감고있다. 그러나 고야의 그림속의 벌거벗은 여성의 대담한 표정과 몸짓은 당시 사람들이 익숙하게 여겼던 다른 누드화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조금도 순종적이지 ㅇ낳았다. 또한 그렇기에 그의 그림 속 여인은 더욱 관능적으로 보였다.
그림 속 여성의 대담한 포즈와 시선처리는 이후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에서 재해석되었으며,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에드가 말로는 이 작품에 대해 '추하지 않고 에로틱하게 그려진 최초의 누드화'라고 평했다.
<옷 입은 마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연구한 후 동판화로 복제했으며, 그의 작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 캔버스를 앞에 두고 선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으며 <시녀들>의 화면 구성을 따랐다.
왕실의 초상을 기품있게 담아낸 벨라스케스왇 달리 고야가 그린 왕족의 모습은 매우 초라하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속 인물들은 볼품없는 정도를 넘어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다.
인상주의
모든 것을 가졌으나 타고난 아웃사이더,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올랭피아>
<올랭피아> 속 나체의 여인은 굵은 목에 비율도 너무나 평범한, 그리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녀는 지극히 평면적으로 표현된 침대에 낡은 신발을 신은 채 누워 있는데, 신발을 신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여인이 신화 속 여신이 아닌 현실의 평범한 여인임이 드러난다. 사람들을 더욱 못마땅하게 만든 것은 그림 속 모델이 당시 파리의 매춘부라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 <<춘희>>에 등장하는 파렴치한 악녀의 이름으로, 당시 파리의 매춘부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또한 화면 속 여인은 발가벗었으면서도 목에 초커를 두르고 팔찌를 찬 모습이다. 이는 이 여인이 보통의 여염집 숙녀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소품이다. 특히 초커는 당시 무희나 매춘부가 주로 애용했던 액세서리로, 여인의 사회적 신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련의 발 언저리에 등장하는 검은 고양이 역시 도상학에서 성적 자유분방을 상징하기에 어떻게 보더라도 매춘부를 그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또 어떠한가? 정면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기존의 누드화 속 익명의 여인들은 수줍은 듯한 시선으로 수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랭피아> 속 여인은 자신의 알몸을 보고 있는 우리와 당당하게 눈을 맞추고 있어 오히려 관객이 불쾌감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풀밭 위의 점심>
이 그림에 대한 논란의 첫 번째 이유는 관람객의 눈에는 너무나 형편없어 보이는 그림 실력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작품은 원근법과 명암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는, 말하자면 미술의 '미'자도 모르고 그린 그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을 보면 맨 앞에 놓인 과일과 바구니, 중간에 앉아 있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 뒤쪽의 물가에 발을 담그고 몸을 숙인 모습의 여인 사이에 물리적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이 작품에 대해 '마네가 데생과 원근법을 배우면 그의 재능도 빛이 날 것'이라며 조롱했다.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마네는 모네의 재능을 진심으로 아꼈고, 후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면서 그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모네가 잠시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머물던 시절, 마네는 그를 찾아갔다가 작업 중인 모네와 그의 아내 카미유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선상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라는 이 그림을 보면 모네는 작은 배를 개조해 만든 야외 화실을 강에 띄워 놓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스튜디오 작업만을 고집하던 마네가 야외에서 그린 첫 번째 그림으로, 마네는 모네를 통해 야외 작업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한편, 부유한 환경에서 생활한 마네는 가난에 허덕이는 모네에게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었다. 1880년대까지 화가로서 변변한 돈벌이를 하지 못했던 모네가 그림 작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꾸준히 도와주었으며, 1879년 카미유가 갑작스레 사망했을 때에도 마네가 장례식 비용을 부담했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마네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보자. 폴리 베르제르는 현재까지도 운영 중인 파리의 '카페 콩세르'로, 이는 19세기 당시 발레에서 서커스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파리인들의 사교의 장이었다. 그러나 마네가 그 공간에서 주목한 것은 한데 어율려 여가를 즐기는 파리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바 안쪽에 서서 주문을 받고 있는 여성 바텐더를 정면에서 묘사하고 있다. 지루한 듯 살짝 멍하면서도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이 여인엥게 폴리 베르제르는 유흥의 공간이 아니라 철저히 노동의 공간이다. 우리는 그녀의 뒤편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그녀 앞에 펼쳐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거울에 비친 반영은 실제의 모습이라 믿기 어렵다. 특히 오른편에 비친 그녀의 뒷모습은 그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그녀 외에 또 다른 바텐더가 있는 것처럼 어색하게 표현되었다. 정면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바텐더의 반영은 그녀의 바로 뒤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반영은 그녀 자신이 가리고 서 있으므로 실제의 모습대로라면 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볼 수 없어야 한다. 또한 멍해 보이는 앞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뒷모습은 그녀 앞에 서 있는 남성에게 몸을 살짝 기울여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자세로, 모순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남성 역시 너무 크게 표현되었다. 마치 원근법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린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거울에 비친 왜곡된 이미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지만, 이 모든 것에 마네의 의도가 숨어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초기 작품에서처럼 당시의 공식적인 취향과 전통 회화의 관습에 맞서 이차원의 평면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이는 당대 사회에서 은밀히 벌어졌던 도덕적 타락의 장면을 효과적으로 부각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당시 파리에서는 술집에서 바텐더와 고객 사이의 매춘이 성행했는데 이에 대한 마네의 비판적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올랭피아>에서처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에서도 그는 도시인의 생활과 그에 대한 냉철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빛을 담아낸 화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카미유(초록 드레스의 여인)>
1866년 모네는 <카미유>라는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해 호평을 받으며 입선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무명작가였던 모네의 이름을 마네로 오해해 실제로 마네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에 화가난 마네는 자신과 이름이 매우 유사한 신인 작가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평론가들까지도 단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살롱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모네와 문제적 작가 마네를 함께 다루는 글을 발표해 계속해서 마네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네와 모네는 1869년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모네가 젊은 작가들의 우상이었던 마네에 대한 존경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이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모네는 1866년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오마주한 동명의 작품 <풀밭 위의 점심>을 그리는 등 오랫동안 마네를 존경해오고 있었다.
<인상, 해돋이>
인상주의라는 명칭은 비평가 루이 르로이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보고 조롱 섞인 어조로 '영원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의 인상을 담아냈다'라고 평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화단에서 인상주의가 주류로 받아들여지기전까지 '인상주의, '인상주의자'라는 명칭에는 미완성, 영원하지 않은 단지 직관적인 것이라는 등의 부정적 의미가 다분했다.
<인상, 해돋이>는 견고하게 완성되지 않는 듯한 풍경화다. 여러 색채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완성된 작품인지 여전히 덧칠이 필요한 상태인지에 대한 구분조차 애매하다. 사물의 뚜렷한 형상 없이 대상과 배경의 경계도 모호한 이 그림은 사실적 묘사와 재현적 색채가 중요한 전통적인 회화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이는 빛의 흐름에 따라 작가의 망막에 비친 즉각적이고도 순간적인, 불확실한 색채를 포착한 인상주의적 양식을 지닌 최초의 그림이다. 해수면 위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그것이 바다에 비치는 색채까지, 이후 모네가 평생 연구했던 '빛에 의해 변화하는 색채'를 캔버스에 담아내려는 시도가 바로 <인상, 해돋이>에서 시작되었다. 르아브르의 고향 집에서 내려다본 항구의 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빛의 본질을 포착하려 노력한 그의 결과물이다. 멀리 부둣가에 흐릿하게 보이는 공장 굴뚝의 풍경도 눈여겨보자. 당시로서는 풍경화에 공장의 굴뚝을 묘사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는 풍경화 역시 이상화된 모습으로 표현해 왔던 것이다.
<루앙 대성당 연작>
모네는 평생 동안 야외 작업만을 고수했다. 그에게 '무엇을 그리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 '무엇'이 순간순간 달리 보이는 것에 주목했다. 1893년경, 그에게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다. 다른 계절, 다른 시간, 일조량이 다른 환경에서 같은 대상의 색채가 매번 어떻게 변화하는가,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그는 시간과 계절, 날씨 등에 따라 달라지는 일시적인 시각 체험을 그림에 담아내고자 노력하는데, 그 결과 같은 장소와 소재를 각각 다른 시간과 계절에 반복해서 그리는 '연작'방식을 선호하게 된다. 한 번에 캔버스 10개 정도를 챙겨 야외로 나간 모네는 같은 곳에서 같은 대상을 시간대마다 그렸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양과 방향을 관찰하며 즉흥적인 색채의 혼합을 담아내려 애썼다. 30여점이 넘는 <루앙 대성당> 연작에서 같은 색으로 표현된 성당은 하나도 없다. 이는 물체가 고유한 색을 띠고 있다는 생각,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관념적 색채에서 해방되어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려는 노력이었다. 이렇게 모네의 화폭은 수시로 변화하는 찰나의 색채, 고정된 하나의 색채가 아닌 다양한 색채의 혼합으로 채워졌다.
<수련 연작>
고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색채를 찾아내기 위해 모네가 선택한 소재는 바로 물이다. 수면에 비친 사물과 그 사물을 감싸고 있는 색채는 미세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한다. 그래서인지 모네는 물을 너무나 사랑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에서 죽고 싶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로 그는 물 위에서의 작업에 집착했다. 앞서 보았던 그림처럼 선상 화실을 만들어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1883년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지베르니로 이주해 그곳에 사망할 때까지 46년간 머물렀다. 1890년에는 지베르니의 큰 주택을 구입한 후 손수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모네의 정원에 물이 빠질 리 없다. 그는 정원에 거대한 연못을 조성하고 그곳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곳이 바로 모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련>의 배경이다.
현재 남아있는 <수련>연작은 대략 150여점 정도다. 실제로 모네가 제작한 <수련>의 작품 수는 250여 점이었으나 말년에 제작한 그림들을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가 스스로 폐기해 버린 것이 많다. 노년에 백내장을 앓게 되면서 1923년에는 결국 수술까지 받아야 했지만, 그가 쇠퇴하는 시력을 붙들어 가며 집중한 대상이 바로 수련이 떠 있는 연못이었다. <수련>연작을 감상하다 보면 모네의 시력이 온전했을 당시 그렸던 것과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 그렸던 것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시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그의 그림 속 수련 역시 형체가 사라져 갔고 색채만이 남게 되었다. 특히 1900년에서 1926년 사이에 제작한 작품 속의 수련은 윤곽선 없이 형태와 색채가 뒤섞인 모습이다.
타고난 유랑자,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에 대해서 이야기가 분분하다. 그들이 싸운 원인이 바로 이 작품이라는 설이 있는데, 초점 없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표현된 자신의 모습을 본 고흐가 매우 분노했다는 것이다. 고흐의 분신이기도 한 해바라기 역시 시들어 생기를 잃은 모습이고, 손에 들린 붓은 너무나 가늘어 그림 한 점도 제대로 완성할 수 없어 보인다. 고흐의 독단적인 성격에 질린 고갱이 그림으로 복수한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는데 어찌 됐든 이것이 당시 고갱이 바라본 고흐의 모습이다. 고갱은 이 그림을 통해 고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고흐의 천재적 재능에 대한 질투심과 동시에 그러한 재능과 열정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고흐에게 연민도 느꼈을 것이다.
<황색 그리스도>
고흐와의 동거가 비극적으로 끝난 후 도피하듯 파리로 떠난 고갱은 다시 퐁타방으로 돌아가 자신의 역작 중 하나인 <황색 그리스도>를 완성한다. 이는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기 전 그린 것 중 최고라고 평가받는 작품으로, 강렬한 노란색으로 칠한 예수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의 깡마른 몸과 표정이 너무도 단순하게 표현되어 샛노란 색채가 더욱 강조된다. 이 작품에서는 인상주의 화풍에서 벗어난 고갱의 양식적 변화가 잘 드러나는데, 작가의 주관이 담긴 강렬한 색채와 그것을 더욱 부각해 주는 평면화된 화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원근법과 명암 표현을 의도적으로 생략했고, 각 채색면의 둘레를 윤곽선으로 감쌌다. 평면의 채색면과 굵은 윤곽선이 두드러지는 이 기법은 클루아조니즘이라 불리며 인상주의에서 비롯된 형태의 해체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기도 한다.
작품 속 십자가는 퐁타방 근처의 트레말로 성당에 걸려 있는 나무 조각상을 참고해 그린 것이다. 실제로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가느다란 나무 조각상으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림 속 풍경의 배경은 퐁타방의 생트 마르게리트 언덕이며,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고 있는 여인들은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즉 그의 그림 속에는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섞여있는 것이다. 이렇듯 공간과 색채는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반면 한편으로는 사실적 요소를 작품에 함께 담았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추구한 고갱의 '종합주의'다. 이러한 종합주의는 이후 야수주의와 추상에 이르는 현대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상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예수의 모습도 흥미롭다. <황색 그리스도>에서 예수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숭고한 표정이 아니다. 또한 전경에 는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인들이 등장하지만 뒤쪽 배경에는 이러한 종교적 사건 혹은 환상 세계와 무관하게 농사일에 전념하는 이도 보인다. 아를을 떠나 다시 찾은 퐁타방에서 마침내 고갱은 자신만의 길을 발견해 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아베 마리아)>
<이아 오라나 마리아(아베 마리아)>는 첫 번째 타히티 시절(1891-1893)의 대표작이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는 타히티어로 '나는 마리아를 숭배합니다'라는 뜻으로, 수태고지의 순간에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전한 인사말인 '아베 마리아'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림 속 인물은 모두 피부색이 까무잡잡하고 타히티의 전통 복식 차림이다. 서구 회화의 전통적 주제를 남태평양 버전으로 옮겨 인물과 배경을 재구성 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지평선을 높여 하늘이 보이지 않게 한 대신 울창한 식물과 열대과일 등 타히티의 풍경으로 배경을 채웠다. 일반적으로 종교화에서는 성스러운 배경을 표현하기 위해 지평선을 낮추고 하늘을 많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의도적으로 하늘을 제외해 그림의 배경이 세속의 공간임을 암시한 것이다. 그림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과 목말을 탄 아이의 머리 위에 후광이 표시되어 있어 이들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인 것이 드러나고, 왼쪽의 수풀 뒤쪽에는 종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개 달린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으로 전통 의상을 입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두 여인도 전통적인 종교화의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천사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도 현실의 풍경과 초자연적 현상을 조합하는 그의 기법이 드러난다. 또한 성모자를 보좌하는 천사의 모습이 서구 중심적인 종교화의 도상에서 벗어나 두 손을 모으는 이국적 종교의 기도방식을 따르고 있는 데서 그가 바랐던 이상향이 바로 이곳, 타히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갱은 이 작품이 라파엘로의 <성모자상>보다 아름답다고 자신했다. 스스로 이 작품을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했으며, 2년간의 타히티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갈 때 이 작품에 대한 파리인들의 열렬한 환호를 기대했다. 그러나 전시회를 열어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을 선보였을 때 파리인들의 분노를 가장 크게 산 작품이 바로 <이아 오라나 마리아(아베 마리아)>였다. 당시 서구에서는 타히티를 비롯한 식민지와 그곳에 사는 원주민을 문명적으로 우월한 유럽인에게 구제받아야 하는 미천한 대상으로 인식했다. 그런 그들이 숭배하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들이 미개하다고 여기는 식민지 원주민의 모습으로 표현했으니 이 그림에 쏟아진 비난을 짐작할만하다. 그들에게 이 그림은 신성모독이었다. 고갱은 이 작품을 뤽상부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거절당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전시회가 실패로 끝나고 경매에서도 그림을 한 점조차 팔지 못하자 고갱은 1895년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다. 그러나 다시 찾은 타히티에서 그는 첫 번째 타히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졌다. 경제적으로 빈곤했으며 문란하게 생활한 탓에 매독에 시달렸다. 특히 1897년에 그의 딸 알린이 13살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그는 극도의 무력감과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고갱은 그의 또 다른 역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남긴 채 자살을 기도한다. 마치 유서처럼 못다한 이야기를 그림 속에 남기기로 작정한 그는 1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한 후 산에 올라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
마치 벽화처럼 가로로 기다란 대형 화폭에는 삶의 모든 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흐름에는 삶을 바라보는 고갱의 시선이 담겨있다. 누워있는 갓난아이부터 노인의 모습까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한 화면에 담은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그림 한가운데 서서 사과를 따고 있는 젊은이다. 서구 문화권에서 사과는 선악과, 즉 피할 수 없는 치명적 유혹과 원죄의 근원을 상징한다. 인간이 달콤한 선악과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씻을 수 없는 죄를 얻게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언젠가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은 허망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는 아마도 당시 고갱이 느꼈던 인생무상의 표현이 아닐까.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작품은 상당히 철학적이며, 특히 삶의 순환이라는 동양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자살을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그가 생각한 인생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1903년 매독과 영양실조로 인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둘 때까지 타히티 원주민의 삶을 매개로 이국적 원시주의를 시각화해갔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순수의 세계를 타히티에서 발견했던 것일까. 그가 상상한 낙원의 모습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는 그곳에서 건강하고 밝은 색채를 탐구하며 타히티의 여인들을 통해 근원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최후의 승자,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담뱃대가 놓인 빈센트의 의자>, <책과 양초가 놓인 고갱의 의자>
고흐와 고갱이 헤어지기 며칠 전 고흐가 그린것으로 알려진 그림 두 점이다. 마호가니로 만든 듯 보이는 고갱의 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세련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만 어두운 색감이며, 의자에는 책과 양초가 올려져 있다. 이는 고흐가 바라본 도시인 고갱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특히 의자 위에 놓인 책인 체계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그에 대한 동경의 표현으로 볼 수 도 있겠다. 그에 비해 고흐의 의자는 소박하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순한 형태다. 의자 위에는 담뱃대 하나가 달랑
놓여 있을 뿐이다. 마치 시골 농부의 의자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결코 초라해 보이지는 않는다. 고흐가 생각한 진정한 예술가는 농촌의 생활과 그곳 사람들의 삶자체를 담아내는 밀레와 같은 모습이었다. 주인 없이 비어있는 두 의자는 더이상 함께하기 어려운 당시 그들의 모습을 암시하며 고흐가 스스로 인식한 고갱과 자신의 차이를 보여준다.
<감자 먹는 사람들>
고흐는 음영이 뚜렷한 색채 기법과 전체의 강렬한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를 생략하는 방식 등을 렘브란트의 작품을 통해 익혔다. 특히 렘브란트가 후기에 보여 준 화면에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해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은 이후 표면의 질감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고흐의 붓터치가 탄생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 속에는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수확한 감자를 먹는 농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고흐의 초기 작품에는 농부나 공장 노동자, 광부 등과 같이 시골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는 극빈층 노동자의 삶을 멀리서 연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함께 가난의 고통을 체험하며 그들의 일상을 작품에 담아냈다. 그에게 주제 면에서 영향을 준 작가가 바로 <만종>, <이삭 줍는 사람들>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멜레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도 역시 예술은 민중을 향해야 한다는 고흐의 인식이 드러나낟. 이 작품에서는 일반적으로 고흐 하면 떠오르는 현란한 색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인물의 얼굴을 밝혀 주는 것은 중앙의 작은 등불 뿐이다. 등불이 비춘 농부들의 얼굴을 보자. 그들의 얼굴은 마치 동물처럼 묘사되어 더욱 비참해 보인다. 당시 고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여과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 내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정작 이 작품의 실제 모델들은 너무도 혐오스럽게 표현된 그들의 모습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그를 비난했다. 심지어 그림 속 주인공들이 생활하는 교구에서는 이후 고흐의 모델이 되는 것을 금지했고,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흐가 표현한 자신들의 모습을 끔찍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작품 속 인물들이 '땅을 경작할 때 쓰는 바로 그 거친 손으로 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애썼다'면서 '그렇기에 그들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언급하며 노동자를 향한 일종의 존경을 드러냈다.
<일본풍 : 빗속의 다리 (히로시게 목판화 모작)>
안트베르펜에서 고흐는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를 접했다. 이는 에도시대에 유행한 일본의 풍속화로, 극도로 평면적인 화면 속에 축약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우키요에에서 드러나는 흐릿하지 않은 확실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의 부재 등의 특징은 회화에서 '대상의 사실적 재현'에 익숙했던 유럽 사람들에게 이색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유럽 전역에 일본 문화 열풍이 불었고, 고흐 역시 이 열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키요에를 보고 감탄한 고흐는 우키요에를 수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유화로 직접 모사하기도 했다. 그 후 고흐의 작품에는 대각선 구도의 원근법이나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한 윤곽선, 그림자의 부재 등 우키요에의 특징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몇몇 작품이 아니라 고흐의 작품에 전반적으로 드러난다.
<밤의 카페>
파리 생활에 지친 고흐는 도시를 떠나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다른 예술가들과 모여 서로 토론하고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공동 생활을 꿈꾸게 된다. 아를을 선택한 것은 그가 에밀 졸라와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통해 남프랑스에 친숙했으며, 그곳에서 자연과 투명ㅁ한 빛, 강렬한 색채를 발견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고흐는 아를을 '푸른 빛이 감도는 밝은 색채의 고장'으로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를에서 3년간 머무르며 고흐는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색채는 더욱 강렬해졌다.
고흐가 아를에서 처음으로 머물게 된 것은 레스토랑 '카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카자르'라는 카페 겸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알카자르는 밤을 새워 영업하는 곳으로, 여관에 갈 돈이 없는 사람이나 건달, 창녀가 밤을 보낼 수 있는 카페였다. 이 카페를 그린 작품이 <밤의 카페>다. 고흐는 '광기의 장소'로서 이 카페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으로 어두운 느낌이다. 색채와는 다르게 카페에 있는 인물들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술에 취한 듯 흐리멍덩한 기운이 모두에게 퍼져 있다. 이 공간 자체가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음울한 분위기로 묘사되었다. 특히 짧은 선으로 일렁이듯 표현 된 램프의 노란 불빛이 그들의 몽롱함을 더욱 배가하고 있다.
<꽃병에 꽃혀 있는 열두 송이 해바라기>
고흐는 노란색을 사랑의 색이라 여기며 무척 좋아했다. 또한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만 묘사했던 그에게 꽃은 아주 좋은 소재였다. 그중에서도 해바라기는 그의 강렬한 색채를 담아내기에 가장 좋았다. 물론 파리에서도 해바라기를 그렸지만, 원색의 노란 꽃잎이 시선을 사로잡는 고흐 특유의 해바라기 그림은 고갱과 공동 생활을 시작한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바라기는 고흐의 또다른 자아였다.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남프랑스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영원불멸의 태양에게 영향을 받는 꽃이었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존재였다. 이때까지 고흐는 희망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마침내 꿈꾸던 세계로 발을 들인 것만 같았다 .특유의 붓터치로 덧칠한 노란 꽃잎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별이 빛나는 밤>
1888년 12월 23일 고흐의 자해 소동으로 그와 고갱의 인연은 끝이 난다.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귓볼을 자른 후 그것을 신문지로 감싸 근처 사창가의 매춘부에게 건넨 것이다. 잘린 귀를 본 여성이 그 자리에서 기절하자 고흐는 달아났고, 다음 날 이 사건이 지역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그 후 고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고흐를 떠났고, 고흐 역시 마을에서 추방되었다. 자해 소동 이후로도 잦은 정신이상 증세로 고통받던 고흐는 1889년 5월에 생레미의 정신병원 생 폴 드 모졸에 스스로 들어간다. 아를의 주민들이 자신의 감금을 요청했다는 사실에 그는 크게 상처받았고, 유일하게 그의 옆에 있어 준 테오가 결혼을 하게 되자 철저히 소외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그의 창작 활동은 끊이지 않았고, 창문이 있는 어두침침한 병실에서 그는 걸작을 탄생시킨다. 바로 그의 대표작인 <별이 빛나는 밤>이다. '모마 미술관'이라 불리는 뉴욕의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작품은 고흐가 3일 밤을 새워 완성한 것이다. 파란빛과 보랏빛 초록빛을 머금은 밤하늘이 힘차게 반짝이는 노란 별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진다. 짧지만 거친 선으로 드러나는 감각적인 붓터치로 칠흑같은 밤하늘과 그 아래 조용히 잠든 마을을 그려냈고, 밤의 풍경 한쪽에는 거대한 탑처럼 사이프러스 나무가 솟아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고흐가 이 시기에 즐겨 그리던 것으로 서구 문화권에서는 이 나무가 주로 무덤가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죽음이나 외로움, 고독을 상징하기도 한다. 반짝이는 밤의 풍경을 마치 검은 글미자처럼 가로막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에서 고흐의 소외감과 고독이 느껴지는 듯 하다. 고흐는 색을 그 자체로 인간으로서의 화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이 작품에서 전해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처연함은 당시 작가의 내면 모습이 아니었을까.
돌 속에 갇힌 인간의 신체를 꺼내다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1917
<지옥의 문>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을 형상화 한 것.
로댕은 <신곡>에서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지옥을 여행하며 만나는 여러 군상을 이 작품에 빚어내고자 했다.
1880년에 구상을 시작한 지옥의 문은 20년이 넘도록 수정이 반복되었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뒤엉킨 인물들 사이에 또 다른 인물을 끼워 넣고 인물의 위치를 바꿔보기도 하며 끊임없이 작업했지만 그가 담고자 했던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로댕의 대표작으로 꼽는 <세 망령>, <아담>, <이브>,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키스> 등은 <지옥의 문>을 위해 구상한 부속 조각이었다.
로댕은 1888년부터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부속 조각들을 독립된 개별 작업으로 떼어 내 대형 조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중에도 그가 끝까지 고심한 인물이 바로 <지옥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이 문지기는 초기 작업에서는 흉물스럽고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나 여러번 수정을 거쳐 지금의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화했다.
<칼레의 시민>
로대으이 작품은 발표 초기에 논쟁에 휩싸이는 것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칼레의 시민>이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다. 이를 단어 뜻 그대로 대변하는 듯한 프랑스의 역사적 일화가 바로 '칼레의 시민들' 이야기다. 14세기경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1354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지역을 점령한 후 봉쇄했다. 영국군과 칼레 시민의 대치 상태는 11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나 결국 칼레 시민들이 영국군에 항복하게 된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을 몰살하는 대신 시민을 대표해 6명이 희생을 자처하면 나머지 시민들을 살려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가장 먼저 목숨을 내놓은 인물이 칼레의 제일가는 부자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였다. 그를 따라나선 나무지 다섯 인물도 칼레의 시장과 법률가 등 칼레를 대표하는 상류층이었다. 당시 임신중이었던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간곡히 청하여 처형은 취소되었지만, 칼레시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들의 희생정신은 지금까지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고 있다.
1884년 칼레시는 칼레의 영웅이기도 한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로댕에게 조각상을 의뢰한다. 아무도 칼레시에서 기대한 조각은 결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칼레 시민들의 영웅적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댕이 완성한 <칼레의 시민> 속 인물들은 결코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소 미화되어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처럼 죽음에 당당히 맞선 모습이 아니라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러워하거나 멍한 눈빛으로 체념하는 모습 등으로 표현된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여느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도 인간적으로 묘사된 조각의 모습에 실망한 칼레시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더군다나 역사적 영웅을 기리기 위한 의도로 제작하는 공공 기념물은 대부분 거대한 사이즈로 만들거나 혹은 높은 받침대 위에 설치되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우러러볼 수 있도록 구상해 왔던 것과 달리 <칼레의 시민>은 지면에 놓여 관람객이 그들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게 제작했다. 칼레의 시민들은 우리와 함께 서 있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 역시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습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장치가 오히려 그들의 영웅적 면모를 더욱 부각해 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늠름한 영웅이 아니라 사실 지극히 평범한 인간임에도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희생을 결심한 모습에서 그들의 고귀한 정신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죽음을 결심했지만 공포감에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고뇌가 절절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오노레 드 발자크>
로댕은 1891년 문인협회로부터 프랑스의 위대한 소설가 발자크의 조각상을 의뢰받는다. 7년이 넘는 제작기간 동안 발자크의 작품과 삶까지 연구하며 작업한 로댕은 맘침내 그 결과물을 선보이는데, 이 작품을 접한 문학협회가 조각상의 인수를 거절한 것이다. 높이가 무려 약 3m에 달하는 거대 조각으로 표현된 발자크는 '비대한 괴물의 등장', '대형 펭귄의 모습'이라는 당시의 조롱 섞인 평가처럼 마치 커다란 포대를 걸친 듯한 모습이다. <칼레의 시민>과 마찬가지로 협회와 대중이 기대하는 천재적 소설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가를 상징할 만한 그 흔한 펜이나 책 등의 소품 하나 없으며, 심지어 발자크의 손조차 표현되지 않았다. 많은 것이 생략된 조각인 것이다. 발자크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만 제대로 묘사되었고, 그 외의 부분들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었다. 아마도 이는 그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로댕은 이러한 발자크의 조각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실제로 발자크와 닮은 모델을 섭외해 수많은 드로잉과 조각상을 제작하는 등의 예비작업을 거쳤다. 예비 작업에서도 그는 등이 휘고 배가 나온 모습으로 발자크를 그려냈다 .실제로 발자크는 매일 12시간이 넘도록 책상 앞에 앉아 집필 활동에 전념했으며, 하루에 커피를 50잔 이상 마시기도 해 배도 나오고 등은 완전히 휘어 버렸다고 한다. 로댕은 발자크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담아냈던 것이다. 전통적인 인물 조각상의 영웅적, 이상적 요소는 전부 배제하는 대신 그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로댕의 이러한 작업은 추상으로 나아갔따. 그는 인체의 생명력 넘치는 표현과는 달리 그 외의 것은 과감히 생략하고 단순화했는데, 발자크의 조각상에서도 얼굴의 특징만을 드러내고 옷을 걸치고 있는 몸은 세부 묘사를 생략한 채 하나의 덩어리로 표현했다. 이는 190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추상 조각의 전조로 볼 수 있다. 많은 것을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핵심을 담아낸 그의 시도는 현대 조각이 가진 비구상성의 기초를 이루어냈다.
"나는 발자크를 똑같이 묘사할 생각이 없다. 그건 사진이 하는 일이다"
영혼의 끌림, 카미유 클레돌 Camille Claudel, 1864-1943
로댕의 작품 속에서 카미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나이드>,
로댕의 조수가 된 클로델은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손과 발을 제작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인체 조각에서 손과 발은 움직임을 표현해 내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로댕이 조각가로서 그녀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로댕의 작품에 모델로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로댕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던 뮤즈로, 1885년부터 1890년도까지 제작된 그의 작품 대부분 속 모델이 클로델이었다.
<지옥의 문>의 부속 조각으로 제작된 <다나이드>에서 클로델은 영원히 고통받는 여인의 절망감을 온몸으로 표현해 냈다.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옹스 왕의 딸로, 사위가 자신을 제거하고 나라를 가로챌 거라 생각한 아버지의 지시대로 첫날밤에 남편을 살해한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그 죄로 지옥에 간 다나이드가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형벌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로댕은 영원한 형벌 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끝나지 않는 고통에 절망하는 모습으로 다나이드를 나태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클로델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모습으로 가련해 보이는 다나이드를 표현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이 드러난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매끄러운 곡선으로 하얗게 빛나는 여인의 가냘픈 몸과 거꾸로 늘어뜨린 풍성한 머리카락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절망감에 휩싸인 다나이드의 고통과 동시에 여체의 아름다움을 함께 곱씹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키스>
<키스>역시 클로델이 모델로 등장한 작품이다. 상대의 목을 감싸 안은 채 키스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에게서 클로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도 <지옥의 문>의 부속 조각으로 구상한 것이었지만 지옥의 참담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데다가 격정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는 지나치게 관능적으로 느껴져 결국 <지옥의 문>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된 <키스>는 나이와 현실의 제약을 모두 넘어선 로댕과 클로델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하다. 이렇듯 그들은 함께 한 시절 속에서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사쿤탈라>
클로델은 1888년에 발표한 <사쿤탈라>로 살롱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한 명의 조각가로서 미술계에 발을 들이는 듯했다. 사쿤탈라는 인도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녀는 두시얀타라는 왕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신의 심기를 건드려 눈이 머는 저주를 받게 된다. 클로델은 <사쿤탈라>에서 연인 두시얀타가 눈이 먼 사쿤탈라와 재회하고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을 그려냈다. 무릎을 꿇은채 연인을 끌어안는 남자와 그런 그를 위해 고개를 숙여 살며시 기대어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애절하면서도 아름답다. 20대 중반에 만들어 낸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클로델의 천재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과 동시에 그녀는 이미 거장이었던 로대으이 정부라는 비난과 로댕이 작품을 손봐 주었다는 의혹까지 함께 받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듬해에 로댕이<영원한 우상>을 공개하면서 발생했다. <영원한 우상>을 본 사람들은 1년 전 발표된 클로델의 <사쿤탈라>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이번에는 반대로 로댕이 클로델의 작품을 베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사실 <영원한 우상>은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와 분위기, 인물의 포즈 등이 <사쿤탈라>와 매우 흡사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백히 입증된 바가 없어 그저 합리적인 의심으로 남아 있지만, 이로 인해 로댕과 클로델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중년>
로댕과 클로델 사이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로댕 옆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나무 같은 여인이 있었다. 클로델이 로댕의 곁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로댕과 로즈의 관계였다.
클로델은 온전히 자신의 사랑이 되지 못하는 로댕을 떠나 서른에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그녀가 생각한 그들의 관계는 <중년>이라는 그녀의 작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 남자가 늙고 추해 보이는 어느 노파에게 이끌려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고, 그렇게 떠나는 늙은 남자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두 손을 내밀고 있다. 이는 클로델이 바라본 그들의 관계이며, 그녀 스스로 자신을 내쳐진 사랑의 패배자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보이는 색채에서 느끼는 색채로,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비평가 루이 복셀이 '마치 야수가 발에 물감을 묻히고 지나간 것처럼 거칠다'라며 야유한 이후부터 그들은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모자를 쓴 여인>
작품 속 모델인 마티스 부인의 얼굴이 초록색과 노란색, 붉은색 등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분명 초상화인데 얼굴 등의 피부에 살색 물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얼굴을 뒤덮은 다양한 원색은 그녀의 옷과 배경에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얼굴과 배경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보인다. 야수파 작가들은 더 이상 사실적이거나 다수가 그렇다고 여기는 객관적 색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캔버스 속 대상이 현실에서 어떤 색채를 띠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감정이 해석한 대로 주관적인 색채를 만들어 냈다. 보라색 피부, 빨간색 나무, 초록색 하늘 등은 현실에서 보이는 그대로의 색이 아니라 작가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다. 이렇듯 색채의 독립을 꿈 꾼 <모자를 쓴 여인> 덕분에 마티스는 야수파를 이끄는 선구자가 되었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 녹색 선>
이 작품은 <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심지어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사실상 남성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녀의 얼굴 중앙에는 녹색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녹색 선을 기준으로 노란색과 분홍색 등의 색채가 분할되어 칠해졌고, 얼굴에 사용된 녹색과 노란색, 붉은색 등은 그녀의 옷과 배경에도 짝을 이루어 채색되었다. 그림의 모델도 불쾌감을 느꼈다는 이 작품에 대해 마티스는 그저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아름다운 초상화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색채의 표현이 그 자체로 회화였다.
"색채는 결코 자연을 모방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색채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라는 그의 언급 그대로다. 이렇듯 마티스는 원색의 대담한 표현을 즐겼다. 색채의 사실적 재현이라는 회화의 전통적 표현방식에서 색을 해방시켜 고정관념을 깨트렸다. 이러한 자유로운 색채 표현에도 그의 작품이 무질서로 치닫지 않은 것은 견고한 구성 덕분이다. 강렬한 색채의 포착에 집중한 나머지 구성에는 소홀했던 다른 야수파 작가들과 달리 마티스는 구성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주관적인 감각으로 색을 표현했으나 그의 화면은 혼란스럽거나 유치하지 않았다. 즉, 강렬한 색채를 통제하고 그와 조화를 이루는 절제된 형태 덕분에 안정적인 화면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뚤어 단순화해내는 마티스의 직관력이 바로 여기서 돋보인다. 그의 화면에서는 색채가 드로잉을 압도하지만, 그 색채를 든든히 뒷받침해 준 것은 견고한 구성의 힘이다. 다른 야수파 작가들이 1908년에서 1910년 사이를 기점으로 그들만의 거친 색채를 포기한 것과 달리 마티스는 끝까지 야수파의 색채 표현을 사수했는데, 이것 역시 색채와 균형을 이룬 형태의 본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춤> , <음악>
<춤>과 <음악>은 강렬한 색채와 절제된 형태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마티스의 친구이자 그의 후원자였던 러시아의 무역상 세르게이 슈추킨이 모스코바의 저택을 장식할 대형 그림을 주문했고, 그의 의뢰에 마티스는 <춤>과 <음악>을 완성했다.
마티스는 흥겨운 춤사위의 정수를 담아내기 위해 일부러 형태를 단순화했고, 원근법을 생략해 인물의 위치와 거리에 관계없이 화면 안에서 움직임이 일렁거리듯 보인다. 그림 전반에 걸쳐 사용한 푸른색과 초록색, 진한 살구색의 강렬한 대비는 그 자체로 활기찬 힘을 발산하며, 정말 몇 번의 터치로 완성한 듯 단순하게 표현된 인체가 푸른색과 초록색에 둘러싸여 움직임을 극대화해 보여 준다. 그의 색채는 서로 간의 조합이 중요하다. "초록색을 칠한다고 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파란색을 칠한다고 하늘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내가 쓰는 모든 색은 마치 합창단처럼 한데 어우러져 노래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색채의 조화가 이루어 내는 리듬감은 음악에서도 나온다.
푸른색과 진한 살구색 사이의 강렬한 대비는 조화로운 듯 어색한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춤>에서 사용된 색채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이 그림에서도 각각의 색채는 이상할 만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또한 <춤>에서는 강강술래를 하듯 서로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추는 여성들을 표현했다면, <음악>에서는 -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 정면을 향한 남성들이 앉거나 가만히 서서 연주하는 모습을 개별적으로 그렸다. 마치 이 두 작품은 서로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춤추는 인물들의 동적인 형상과 앉거나 서 있는 인물들의 정적인 형상, 한덩어리로 표현된 인물들과 각자 고립되어 있는 인물들, 그리고 시각적 예술인 춤과 청각적 예술인 음악이 두 작품 속에 대구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대응적 구도의 두 작품을 결정적으로 어어주는 것은 바로 리듬감이다. 강렬하고 독립적인 각각의 요소와 그것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균형미는 마티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별한 힘이다.
<푸른누드>
마티스는 지속적으로 회화에서 색채와 형태의 관계를 모색해왔다. 그러나 1943년부터 그는 더 이상 붓을 들 수가 없었다. 1941년에 십이지장 수술을 받은 후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고, 관절염까지 심해져서 더 이상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된 그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종이를 오려 붙이는 컷아웃 방식을 고안했다. 흰 종이에 원하는 색의 구아슈를 칠한 후 물감이 마르면 가위로 오려서 다른 종이에 붙이는 방법이었다.
마티스가 오려 붙이기 위해 만들어 낸 종이의 색채는 무척 다양했다고 전해진다. 파란색과 붉은색, 노란색 등이 여러 톤으로 다채로웠다. 특히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살구색은 무려 열일곱 종류나 있었다고 한다. 마티스는 이렇게 만든 색종이를 오려서 캔버스에 붙이는 방식으로 마치 가위로 데생을 하듯 새로운 화면을 창조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에 대해 그는 '가위로 오리는 작업이 아니라 가위로 그리는 회화'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회화보다 단순한 형태의 구성이 필요했던 이 작업을 통해 마침내 색채와 형태의 완벽한 결합을 이루어 냈다. 그의 작품에서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는 서로 균형을 이루며 조화롭게 결합했다. 총 네 점의 <푸른 누드> 시리즈는 극도로 단순해진 형상과 간결하지만 강렬한 색채의 조화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푸른색으로 표현된 여성의 누드는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또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이는 또한 추상으로 향하는 과도기적 작품이라는 의의가 있다.
<달팽이>
그가 죽기 1년 전에 완성한 <달팽이>와 같이 마치 추상화처럼 어떠한 구체적 형상도 보이지 않고 그저 선명한 색채를 담은 종이들이 캔버스 위를 부유하는 듯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작업을 늙은 작가의 유치한 취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것의 가치를 알아본 이가 바로 피카소다. 마티스의 작업실을 방문해 그의 '종이 그림'들을 직접 본 피카소는 "그 나이에도 이렇게 새로운 걸 할 수 있다니, 마티스 당신은 정말 나를 계속 놀라게 하는군"이라며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나의 작품은 내 삶의 일기장이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
<맹인의 식사>
<맹인의 식사>를 보면 밝고 희망찬 푸른색이 아니라 우울이 감도는 차갑고 검푸른 색채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청색은 바로 이런 색이었다. 화면 가득 길쭉하게 표현된 인물 역시 침울한 느낌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크고 기다란 맹인의 손이 그림의 절망적인 분위기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메마른 손길로 물병을 더듬는듯한 모습은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의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이렇게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표현 방식은 피카소가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 엘 그레코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여름, 몽마르트 언덕의 바토 라부아르에서 피카소는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탄생시키다. 알몸으로 등장하는 그림 속 여인 5명은 절친한 친구였던 조르주 브라크마저도 "불을 뿜기 위해 등유를 마신 것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추한 모습이었다. 특히 화면 오른쪽 두 여인의 얼굴은 아프리카 가면의 모습이며, 몸은 각 부분이 평면으로 분할된 형태로 배경과 결합된다. 당시 피카소는 아프리카 미술, 그중에서도 가면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이때를 니그로시대(1906-1908)라고도 부른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여인은 오른쪽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눈, 코, 입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비뚤어져 있다. 하나씩 다른 방향에서 따로따로 보고 그린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실제와 근사하게 재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을 깨고 대상의 형태를 재구성해 내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입체주의가 시작된다. 즉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주의 탄생의 태동으로 볼 수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전복한 이 작품은 원근법을 철저히 무시하고,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시점을 평면에 중첩해서 담아낸 기하학적 형태로 완선되었다. 세잔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기하학적 형태에 영향을 받은 피카소는 대상의 진실된 외형을 다시 점으로 분해해 사방에서 동시에 분석해냈다. 그는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사물의 모든 측면을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그렇게 그는 2차원의 화면에 3차원의 입체 형태를 구현해야 한다는 미술가의 오랜 과제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마티스를 비롯해 친구였던 미술평론가 펠릭스 페네옹,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모두 이 그림에 비관적이었고, 이에 의기소침해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거의 10년 동안 방치한다. 하지만 독일 출신의 화상이자 미술평론가 칸바일러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당시 야수파였던 조르주 브라크도 이 작품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조형실험에 동참했다.
1910년대 중반에 이르러 <아비뇽의 처녀들>이 크게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피카소도 미술가로서 명성을 쌓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된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는 불안정하게 해체된 형태와 문자 등의 비회화적 요소를 가지고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때는 야수파 동지였으나 후에 피카소와 뜻을 함께 한 브라크의 풍경화를 본 마티스가 "이것은 '작은 입방체들'일 뿐이다"라고 언급한 부정적인 평에서 입체주의(Cibism)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입체주의는 미술을 모방이 아닌 창조로 바라보는 현대 미술의 시작을 알린 사조다.
<게르니카>
파리에서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키고 있던 피카소는 1937년 신문을 통해 자신의 조국 스페인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접하게 된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발생했는데, 이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정권이 나치의 폭격기를 동원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무자비하게 폭격한 것이다. 3시간 동안의 무차별적 맹폭격으로 2천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했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해 개최되는 파리 만국 박람회의 스페인 관에 전시할 벽화를 준비하고 있던 피카소는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사진가 도라 마르의 정신적 독려를 받으며 한 달 반 만에 게르니카의 비극을 대형 화폭에 담아냈다 ."그림의 용도는 집을 장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적을 공격하고 그로부터 방어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라고 언급한 그는 <게르니카>를 통해 우회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작품 속 여러 형상은 일그러져 있고 시선 역시 각기 어긋난 모습이다. 수많은 상처와 비극을 암시하는 이 그림은 단순한 충격 이상의 울림, 즉 파괴된 세상에 대한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감정의 분산을 억제하고자 모노톤으로 그려 낸 화면에서는 절망을 넘어선 분노의 외침이 느껴진다. 실제로 폭격은 대낮에 발생했으나 의도적으로 어둡게 표현한 화면에서 당시의 비극적 상황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작품 속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절규하는 인물들 가운데 무심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황소는 힘을 가진 존재로, 프랑코 독재 정권과 독일군의 폭력성을 상징한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이미지로 울부짖는 말은 그 폭력에 희생당하는 약자, 즉 게르니카 민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에서 황소는 남성성의 상징물로서 전통적으로 힘과 권력을 가진 존재를 나타냈다. 반면에 말은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민초를 대변하는 이미지다. 그림 윗부분에 있는 가스등과 길게 늘어진 팔이 들고 있는 작은 촛불 역시 강자와 약자 혹은 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 아래쪽에는 잘려 나간 팔이 두 개 그려져 있는데, 하나는 부러진 칼을 손에 쥐고 있고 다른 하나는 손바닥에 별 모양 비슷한 무엇이 그려져 있다. 부러진 칼은 민중의 저향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손바닥의 별 모양은 흡사 스티그마타(성흔)처럼 보인다. 힘없는 민중이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는 헛된 죽음이 아닌 고귀한 희생이라고 외치는 듯 하다.
<게르니카>는 프랑코 정권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동안 전 세계를 떠돌다가 1981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그림은 이후 반전을 의미하는 그림으로서 역할했다.
태피스트리로 제작된 이 그림은 평화의 상징물로 뉴욕 UN 본부에도 걸렸는데,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결정했을 때 UN본부에서 열린 당시 국방부 장관의 기자회견 생중계를 위해 평화의 상징 <게르니카>가 잠시 천으로 가려지기도 했다.
<꿈<
〈꿈〉은 피카소가 프랑스 여인 마리 테레즈의 22세 때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마리 테레즈와 피카소가 처음 만난 시점은 피카소가 첫 부인 올가와 여전히 결혼 생활을 하던 1927년으로 그 당시 테레즈의 나이는 고작 17세였고 피카소는 45세였다.
〈꿈〉은 피카소가 입체주의 시기를 벗어나 고전주의 시기에 들어서서 제작한 것이다. 다소 이국적인 벽지 무늬와 온통 원색으로 범벅이 된 여인의 인체는 프랑스 야수주의 회화를 연상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여인 좌상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고수하면서도 여인의 얼굴, 팔, 가슴을 평면으로 분할하고 재구성하여 입체주의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 그림을 제작할 당시 기혼자 신분이던 피카소는 이 어린 소녀를 향한 성적 욕망으로 충만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얼굴이 기울어진 여인의 기다란 콧대를 경계로 왼편 뺨과 눈 부위의 연보랏빛 채색면에서 발기한 남성기의 형체를 찾아내기도 한다(자세히 보면 정말 닮기는 했다). 그림이 완성되고 2년이 지난 1935년 테레즈는 피카소의 아이를 임신한다.
이 작품은 피카소 사후에도 몇 차례 구설에 오르며 유명세를 이어갔다. 그 첫째는 199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다. 당시 4,840만 달러(한화 약 500억 원)에 낙찰되어 당시로써는 6위로 비싸게 거래된 작품으로 기록된 것이다. 둘째 논란은 2006년 이 그림의 소유주인 카지노 재벌 스티브 윈이 그만 ‘실수로’(?) 자신의 발꿈치로 그림을 세게 치는 바람에 그림 속 테레즈의 왼쪽 팔뚝 부위가 무려 6인치 가량이 찢기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의 시사지 『뉴요커』는 이 사건을 두고 「4,000만 달러의 발꿈치」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억제되지 않는 환상과 충동,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기억의 지속>
무더운 날씨에 땅 위의 모든 사물이 햇볕에 녹아버리는 장면을 상상한 적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이 캔버스에 구현된 것이 바로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이다. 1931년 여름, 벤치에서 점심을 먹던 중 더운 날씨에 녹아내린 치즈를 발견한 달리는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의 역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카탈루냐의 해변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는 멀리 바다와 해안선, 황금빛으로 빛나는 절벽의 풍경이 보인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각진 모서리에도, 그리고 감은 눈을 연상케 하는 바닥의 신체 일부에도 녹아내리는 시계가 걸쳐져 있다. 왼쪽 하단 구석의 녹지 않은 회중시계에는 먹이를 찾아 모여든 개미가 떼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달리의 작품에는 그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하는데, 이 작품에는 죽은 형을 대신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 달리가 느껴 온 죽음에 대한 공포가 드러나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달리의 작품에는 그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하느넫, 이 작품에는 죽은 형을 대신 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 달리가 느껴 온 죽음에 대한 공포가 드러나는 듯하다. 녹아 없어질 것처럼 연약한 형상으로 표현된 시계에서 마치 죽음이 임박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편 병적으로 벌레를 무서워한 달리의 작품에 종종 개미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림 속 개미는 그의 억눌리고 비틀린 성적 욕망을 보여준다. 달리는 스스로 발기불능이라 밝혔고, 그의 많은 작품에서 외설적 암시가 드러난다.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떼를 지어 등장하는 개미가 체모로 가득한 여성의 겨드랑이로 변하는 장면이나 그의 그림 <위대한 자위행위자 El Gran Masturbador>에 등장하는 개미 떼는 달리가 가지고 있었던 성적 불안함의 표현이다. 실제로 달리의 성 정체성과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추측이 무성하다.
<메이 웨스트의 입술 소파>
러시아 카잔 출신의 갈라는 달리와 53년간 해로한 그의 아내다. 잦은 스캔들과 남다른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다른 화가들과 비교하면 달리와 갈라의 오랜 결혼 생활은 위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도 그리 평범하지는 않다. 1929년, 첫 개인전을 위해 파리에 머물던 달리는 초현실주의 회화를 전문으로 거래하는 화상 카미유 괴망의 소개로 초현실주의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시인 폴 엘뤼아르를 만난다. 폴 엘뤼아르와 만난 이때가 달리의 인생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 그에게 호감을 느낀 달리가 여름휴가로 머물게 된 카다케스에 엘뤼아르와 그의 아내였던 갈라를 초대한 것이다. 갈라는 달리보다 10살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이미 영혼의 끌림을 느낀다. 이들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갔고, 1934년에 갈라가 엘뤼아르와 이혼하면서 동시에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달리에게 실망한 그의 아버지는 부자의 인연을 끊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자 달리는 자신의 머리를 삭발하고 머리카락을 땅에 묻는 행동으로 아버지에게 절연을 응답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갈라와 결혼한 후 달리는 이전의 위협적인 성적 불안에서 벗어나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갈레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듯 유아기적 집착을 보였고, 이후의 작품 속에서 갈라는 달리의 뮤즈이자 여신으로 등장한다. 갈라는 달리의 작품 속 유일한 여인이었다. 갈라는 신화 속의 레다(Leda)가 되었다가 성모 마리아가 되기도 했다.
갈라는 사교적인 성격에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갈라를 만난 후 달리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는 초현실주의 회화를 제작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상품화한 것이다. 그렇게 달리는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바닷가재 전화기>나 <메이 웨스트의 입술 소파>등의 초현실주의 오브제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메이 웨스트의 입술 소파>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관능미를 대표했던 배우 메이 웨스트의 입술을 본떠 제작한 것이다. 메이 웨스트의 관능미는 사실상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서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초현실주의의 후원자였던 에드워드 제임스의 요청으로 달리는 그녀의 빨간 입술을 소파라는 오브제로 화장시켰다 .소파를 생각하면 자연히 그것의 폭신한 촉감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는 그 대상을 입술로 연결한 것이다. 얼마나 관능적인 해석인가? 달리는 가구 중에서도 신체와 접촉 빈도가 가장 높은 소파에 투영한 본능을 거침없이 형상화한 것인데, 작품의 형상 그 자체만 봐도 매력적이며 유머러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업적으로 변질됐다며 달리에게 손가락질했고, 그 배후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고집하는 갈라가 있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갈라는 달리와 결혼한 후 젊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달리에게는 작품 생산을 강요했다. 향간에는 그녀가 달리의 작업실 문을 밖에서 잠가 그를 통제하고 작업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이들의 관계가 어땠는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늘 강박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던 달리에게 갈라는 어머니이자 지도자, 그리고 뮤즈였다는 사실이다.
일상 속 꿈의 마법사,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1989-1967
<연인들>
마그리트에게는 커다란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그가 13살 때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강에 투신해 자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물 밖으로 건져진 어머니의 얼굴은 당시 그녀가 입고 있었던 옷으로 덮여 있었고, 어린 마그리트가 이를 목격한다. 이러한 과거의 심상이 그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인들>이다. 천으로 얼굴이 덮인 연인이 키스를 나누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림 속 연인이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는 사랑의 맹목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치 서로를 확인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절대적 관계로 보이는 작품 속 연인은 두 사람이지만 하나의 영혼인 것처럼, 혹은 두 영혼의 결합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열려있다. 얼마든지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마그리트 그림의 힘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예술은 논리적이고 철학적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우리가 속한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골콘다>
멀리서 보면 화면 속 신사들이 모두 똑같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신사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과 자세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서 있다. 어떤 이는 선 자세 그대로 정면을 응시하고, 다른 이는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허공을 바라본다. 또 어떤 이는 뒷짐을 지고 측면으로 서 있다. 중절모를 쓴 신사는 마그리트의 다른 작품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그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마그리트는 이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도시를 살아가는 획일화 된 익명의 삶과 그에 따른 소외를 보여주었다. 불안정하게 공중에 떠 있는 인물들은 그저 사회가 나열해 놓은 개성 없는 도시인의 모습, 그러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그 자체다.
<집단적 발명>
<집단적 발명>을 보면 반은 인간이고 반은 물고기인 이미지가 그림 한가운데 누워있다. 하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상상하는 아름다운 인어의 모습이 아니다. 마그리트의 작품 속 인어는 상반신이 물고기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여성의 하체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통상의 비현실적 상상과는 또 다른 충격이 야기되는 것이다. 익숙한 이미지를 전혀 새로운 단계로 확장하는 능력, 마그리트의 작품이 빛나는 이유다. 익숙한 것들이지만 결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미지를 함께 배치해 만들어 낸 낯선 화면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빛의 제국>
마그리트의 또 다른 대표작, <빛의 제국> 연작에서는 낮과 밤이 공존한다. 대낮의 하늘 아래 어두운 밤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낮인가, 밤인가? 낮과 밤이 공존하는 비현실적 이미지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 풍경은 마치 실제의 모습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에는 성질이 다른 두 이미지의 결합에서 부조리함이 연출되는 것이다.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다룬 마그리트의 작품은 수수께끼 같다. 어둠과 함께 있어 빛이 더욱 밝게 보이기도 하고, 빛과 함께 있어 어둠이 더욱 짙게 보이기도 한다.
<이미지의 배반>
<이미지의 배반>을 마주하면 생각에 잠기게 된다. 보란 듯이 파이프를 그려 놓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은 이 기이한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럼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파이프를 파이프라 부르기 전에는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인가? 이 작품에서도 마그리트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지성을 뒤흔든다. 그려진 파이프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단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만약 내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다, 라고 썼다면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 그림이 언어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머리 아픈 이야기는 내버려두자. 시각적 충격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받고 있다. 광고에서도 이러한 카피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미지의 배반>에서 사용한 표현 방식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이미 입증된 셈이다. 침대를 두고 '이것은 침대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광고에서 마그리트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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